2009년 9월 23일 수요일

봉하 마을 후기

당일치기로 다녀온 봉하 마을
2009년 5월 23일을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같다.
아니 잊어선 안되는 날이다.

내 기억속의 노무현은
내가 중학생일때 시험기간 주말이 되면
독서실에서 밤새우며
동네 양아치형들과 독서실 화장실창문으로 건물밖으로 도망나와
(밤 12시가 넘으면 주인아저씨가 건물입구 문을 잠궜다.)
독서실 옆에 있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 몰래 훔쳐 먹던 기억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시장에 가면 들리던 소리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 던지고 큰소리로 호통을 치던
치기 어린 젊은 국회의원
청문회 스타 노무현
그렇게 한 사람은 청문회라는 곳에서
前정권의 대통령을 향해 바른 소리를 할 때
난 불 꺼진 시장속 에서 과일과 우유를 훔쳐 먹고 있었다.

그런 기억을 뒤로 2002년 대선 쯤에 들어서
내 기억속의 노무현이 다시 돌아왔다.
몰랐다. 청문회이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사람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이루고싶어했으며
무엇을 이뤘는지...
단지, 들리는 말에 따라면
김 대중과 함께 빨갱이라는 것
하지만, 그 시기의 김대중은 나에게 더 이상 빨갱이가 아니였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상징이자 어른이였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빨갱이라고 불리우는 노무현은?

2002년 12월 난 노무현을 찍었다.
상식이 통하는 그런 사회를 기대했다.
막연했다. 나에게 노무현은

참 많은 욕을 먹었다.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측으로 간 사람부터 빨갱이
수구세력들의 힘은 컸다.
그리고 진보세력들의 독선도 집요했다.

내가 아는 노무현은 그 어느누구에게도 환대를 받지 못했다.
왜 노무현은 그렇게 욕을 먹어야 되는지 궁금했다.
선거공약으로서 지키지 못한것도 있다.
예를 들면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같은거...
비판을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 무작정 꺼꾸로 돌아가기만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는 그렇게 욕을 먹어야하는가.
그때부터 난 노무현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난 노사모도 아니고 노빠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잡은 역사의 흐름이 틀리지않았다고 확신한다.

노무현을 기억함에 있어
너무도 서운하고 답답하고 원망스러웠던건
열린우리당의 실험이 정동영같은 기회주의자의 손에서 끝나버렸다는거
이인제.김영삼같은 기회주의자들이 더 이상 승리하지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건만 내품안에서 자라난 기회주의의 싹을 자르지 못했던거
그리고 소위 진보로 불리우던 사람들의 성급함
참여정부 5년동안의 진보의 느낌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전리품을 하나라도 더 가지고 가기 위한 이전투구 같은 인상이였다.
그들이 노무현에게 원한건 민주주의의 탈은 쓴 독재를 원했던거 같다.
모든 것이 성급했다.
IMF가 끝났다. 다시 한번 민주정권이 들어섰다.
자. 싹 다 갈아엎어보자
아니 대통령 혼자의 힘으로는 안되는 시스템이 되어버렸네
왜 안되는거지... 노무현대통령 당신이 책임을 지고 다 싹 엎으시오
우리는 민주주의 지켜냈고 정통성을 가진 민주정권을 탄생시켰으니
당신은 敵을 처단 하시오 라고 밀어 붙이는 듯한 인상이였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지나고
난 그래도 믿었다. 나만이 아닐꺼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딴나라가 정권을 잡아도 괜찮다라고 말한 유시민과 노무현도 같은 생각이였으리라 믿는다.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은 이전과는 다르게 시스템적으로 안정화를 찾아갔다.
모든 것이 시스템안에서 움직임을 시작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시스템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적어도 그 시스템안에서 움직일꺼라는 믿음
모든게 틀렸다.

부엉바위에서 바라 본 봉하마을
많은 산에 가려져 그 속에 있는 조그만 그 마을
내가 알던 시골의 풍경과 어느 하나 다를 것도 없는 그 모습
그 새벽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살아온 가치가 한 순간에 부정당하는 느낌은 ...

부엉바위는 조용했다.
담배를 한대 피웠다.

봉화사를내려와 다시
노무현 대통령의 비석앞으로
내가 올 때보다는 제법 사람들이 많아졌다.
주차장은 꽉 차 있었다.
관광버스도 2,3대 보인다.

낮시간이여서 그런지 마을 사람들은 일하러 나간거 같아 보였다.

일상이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대단하지도 않은 그 봉하마을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옮겨진다.

그랬으면 좋겠다.
일상처럼 그렇게 인간 노무현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갔으면
그 곳에 더 이상 사람들이 오지않아도
맘 속에서 살아갔으면

서울로 올라오니 저녁 7시반이였다.
짧은 휴가 서둘러 다음 약속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2009년 9월 19일 토요일

노리삐-와 매스컴

엊그제 16일
7월달에 각성제 취급법 위반으로 붙잡힌(?)
노리코 사카이가 보석금 500만엔을 주고
오다이바에 있는 완간경찰서에서
보석으로 풀려났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약을 했다는 것 자체는 잘 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동안 보여준 일본매스컴의 반응들을 보고 있자면
괴벨스의 말이 생각이 날때가 많다.

경찰서에서 나와 짧게 사과의 말을 하고 차를 타고
기자회견장으로 옮겨 2분 37초간의 사과의 문을 읽고
질문과 대답없이 끝난 노리삐의 기자회견장

그것에 대한 일본 매스컴의 분석을 보고 있자니
일본이 왜 소설의 강국인지 알 수 있을 것같다.

한 마디로 말하면 노리삐의 심경.. 즉..
사과문을 발표했는데 그 문장을 분석 노리삐의 본심을 파악하고
어떤 표현을 썼으면 이런저런 표현중에 이런 표현을 쓴것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으며
문장중 좋은 표현은 어떤 것이였고
좋지않은 표현은 어떤 것이였는지

경찰서에서 나올 때 입고 있던 의상과
기자회견장에서 입고 있던 의상에 대한 분석과
발목과 외손에 있던 문신을 가리고 나온 것은
과연 누가 시킨거며
가렸을때 효과는 어떤 것이며
경찰서를 나올때 블랙의 자켓과 바지였는데
왜 블랙을 입고 나왔을까
기자회견장에서는 올블랙으로 치마와 검은 스타킹을 신고 나온 이유와
그녀의 걸음걸이에 대해서
그리고 경찰서 앞에서 몇 번을 머리를 숙였고
왜 7초간 머리를 숙였는지
그녀가 타고 간 차의 색상이 붉은계열의 차량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TV생중계를 의식해 멀리서도 노리삐가 탄 차를 추적하기 쉽게끔
퍼포먼스였다느니
기자회견장에서는 몇번을 머리를 숙였고
머리숙일때 어떤 말을 했으며
사과문은 과연 누구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인지
그 대상이 제대로 포함되어있는지
...
등등

왜 그런것들이 중요하지?
그녀가 원조아이돌로 불릴만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서?
마약금지대사로 활동했던 이력때문에?
부부가 마약을 해서?
10일간의 도피활동을 해서?
...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들이
동시간대에 몇개의 방송국에서 분석하고 보도하고 예측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노리삐가 누구를 향해 사과를 했고 머리를 몇번을 몇초간 숙였고
무슨 옷을 입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치료를 통해 자립하고
그런 그들을 사회적제도와 인식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찌보면 사회적 피해자일수도 있는 그들이
한번의 실수로 인생전체를 낙인찍히지않게끔
사회분위기를 바꾸어 나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되지않을까?

그녀의 사과문과 의상과 걸음걸이를 분석하면서
그녀가 가면을 쓰고 있고 그 가면안의 본심을 감추는데 능하다는 것을
결론으로 짖지 말고
그녀가 어떻게 하면 그 가면을 벗고
진심으로 카메라앞에 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그런 매스컴의 역할이 아쉬웠다.


2009년 9월 17일 목요일

봉하 마을 다녀왔습니다_04

노무현대통령님을 뒤로 하고
마지막 찾아갔던 그 자리를 찾아 나섰다.

봉화사까지 올라가는 안내도.


안내도 옆에 붙어있는 그리움.


봉화사에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있었다.

저 곳이 부엉바위.


사저가 보인다.


사자바위는 고대 원시인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맨발로 사자바위를 3바퀴돌면 몸에 좋다고 해서
신발을 벗고 돌아봤다.

사자바위에서 본 마을.


봉화사근처에본 부엉바위.




봉화사에서 본 마을전경.


사자바위에서.



부엉바위에 도착했다.
노무현대통령님이 마지막으로 서있던 그 자리
거기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마을 전체가 한눈에 보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자고 있는 집이 보이고
...

생전 마지막 서계셨던 부엉바위.


거짓으로 밝혀졌다고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님이 있던 그 자리에서
마지막 담배를 같이 피우고 내려왔다.

돌아가시고 몇달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봉하마을
어제 故김대중前대통령님의 묘비도 누군가 훼손하려고 했다고 들었는데
이 미친 나라의 끝이 어디인지...

봉하 마을 다녀왔습니다_03

노사모회관앞으로 지나면
바로 보이는 곳이 故노무현前대통령님의 생가
예전에 보수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완공됐나보다.
하지만 생가도 그렇고 권양숙여사님이 살고 있는
자택은 접근금지였다.
작년에 왔었더라면 해맑게 웃는 모습과 함께
사저근처에도 갈 수 있었을텐데...

앞에 보이는 곳이 생가 뒤에는 사저가 보인다.


사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경비소가 세워져있다.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사저.


복원된 생가의 모습이다.


생가와 사저를 지나면 노무현대통령님의 비석이 보인다.
허허 벌판에 서있는 비석을 보니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적어도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노사모 회원분께서 지켜드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부엉바위.


평일 오후 2시쯤이여서 그런지 주차장에는 차가 가득 들어차 있지만
묘비앞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한 가족 3대가 모여 그리움을 달래고 있었다.

노무현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절하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비석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강철판을 대었는데 비때문에 그런지 첨과 달리
붉게 녹이 쓴 모습이 더더욱 안쓰러웠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비석아래 붉게 물든 녹을 보니 맘이 아프다.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봉하 마을 다녀왔습니다_02

서울역에서부터 출발
봉하마을까지 가는 동안
5월23일부터의 일주일과
탄핵을 막기위해 광화문앞에서 모여
촛불을 들던 기억들이 밀려들어와
혼자서 눈물을 훔치며 갔다.

택시를 타고 10분정도
들어가면
봉하마을이 보인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살던 그리고 그 정신이 살아있는 마을 치고는
너무나 초라해보이는 풍경

저멀리 사자바위와 노무현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두 발로 서있던 부엉바위가 보인다.


아.. 내가 사랑하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이런곳에 살고 있었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골 그대로의 모습의
그 곳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건
노사모회관의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셨던 내 대통령


그 옆 주차장쪽에 보이는 것은
웃음짖고 있는 노무현대통령의 얼굴

봉하마을 입구에서 언제까지나 웃음으로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마을회관에 걸려있는 노무현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의 사진

대한민국 민주주의 두 기둥이시던... 너무나 일찍 떠나셨습니다.


그래..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왔던 그 두분의 대통령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 두분의 얼굴을 뒤로 하고
노무현대통령을 만나러 발 걸음을 옮겼다.

봉하 마을 다녀왔습니다_01

봉하마을에 다녀왔습니다.
당일치기의 바쁜 일정이였지만
작년의 나태함때문에 만나보지 못한
故노무현前대통령을 만나러 갔습니다.

11일 아침 10시반 KTX를 타고 밀양으로 출발

2시간반정도에 밀양에 도착

밀양에서 진영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고
30분정도 더 들어가는 곳에 진영이 있습니다.

진영역에 내려 봉하마을 까지 들어가는 수단은
버스와 택시가 있지만
버스는 제가 도착한 시간에는 벌써 출발 다음 편까지
한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려
택시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택시비는 6000원정도

휴가 다녀왔습니다. 休みから戻りました。

6박7일의 짧은 휴가 였지만
어머니와형 얼굴도 볼 수 있었고
결혼식도 볼 수 있었고
배썅도 볼 수 있었고
봉하마을도 찾아갈 수 있었다.

녀석들은 거의 졸업해
자리찾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고
형으로 내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은 내년 7월달쯤이 아닐까 한다.

그때까지 잘 지내게들
六泊七日の短い休暇だったが
母と兄の顔も見られたし
結婚式も見られたし
ヘーサンも会えたし
ボンハ村も訪ねられました。

奴らはほとんど卒業して
自分の居場所を作ることで夢中だし
年上の俺に自分のことを
改めて考えさせてくれた。

次は来年7月ぐらいかな。

その時まで皆、お元気に

2009년 9월 8일 화요일

박재범 탈퇴했다네요

다들 이제 행복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재범이 빠진 2PM 이전처럼 사랑하시겠네요?

그가 100프로 잘했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고
-왜쿡에서 사는 입장으로서는
그가 욕한 `한국`이 결국 그를 쫒아냄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승리감의 오르가즘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로 인해 그의 입에서 더이상 `한국이 좋아요`라는 말은
나오지 못하겠네요

잘 하셨습니다.
한국이 싫다고 한 젊은이에게 정말로 한국이 싫게 만드셔서
대단하십니다.

오후2시를 좋아했던 분들은 그분들 나름 배신감의 상처를 입었을테고
재범은 재범대로 한국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만을 남기고 떠나겠지요

결국 이 미친 상황은 어느 한쪽도 감싸주지 못하고
서로에서 상처만주고 끝났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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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일본에서 4년째 살고 있고
일본이라는 나라
일본인
아직도 그들과 이 나라를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타테마에라는 이름의 겉모습에 속아(?)
진심으로 대했다가 허걱 했던 적도 있다.

그럴때마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이 싫어졌다.

왠지 일본인들은 살 부대껴 살아가기 힘들다.
어쩌면 일본에 오자마자 5개월만에 입사한 특수한 상황탓도 있으리라
위안하지만서도
회사에서 만난 일본인들엑 진심으로 대할수 없을 만큼의
벽이 생겼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고 해야만 할 일이 있다.
그래서 난 일본에서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

슬랭어로 지껄인 재범의 글
그 사람의 인성과 인격의 문제는 둘째치고
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문화적 차이에 있어 언제나 느끼는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일본에 있고
그들의 정신적 딱딱함에 한없는 답답함을 느끼는 것

지금은 이렇게 일본에 대해 말해도 앞으로 몇년뒤에는
일본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09년 9월 5일 토요일

한국이 싫어 - 2PM 박재범의 해프닝에 대해서

방금 다음 연애란 기사를 보니
2PM 이라는 그룹의 한 멤머가 2005년에 쓴 한국 비하발언이 문제가 되어
사과문을 발표하고 쓰나미가 한번 훑고 지난 간거 같다.

얼마전 미수다의 베라의 책이 문제 아닌 문제가 되어
인터넷을 한번 뜨겁게 달구었는데

이번 사건(사건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에도 역시
댓글은 인격적인 모욕부터 시작해 그걸 확대 재생산 하는 한심한 찌라시등 참으로 다양하게 궁상짓들을 한다.
-2005년도 글을 찾아낸 사람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마이스페이스에서


예전에 미수다에서 나온 말중에 한국인들은 한국사회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말이 있었다.
즉,한국에 대한 나쁜 점을 지적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나쁜점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굉장히 격한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한국인의 인식작용,
나도 꽤 많이 경험을 했다.
일본에 와서 일하면서 가끔 한국은 이런 점이 안 좋아, 또는 한국인은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어 라는 말을 듣게 되면 너희 일본인들은 이런 이런 점이 안 좋아 라고 말해버린다는 것이다.-여기서 人이라는 말은 社會와 동일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단점을 받아 들임에 있어서 한국인(나를 포함)은 한국사회의 단점마저 개인의 단점으로 치환하여 인격적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의 단점을 이야기 한 것뿐 일본의 높여 세운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단점을 찾아내 상대방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되는 나같은 한국인들이 굉장히 많다.

이번 일도 외국에서 태어나 살고 문화를 몸에 익힌 사람이 한국에 살게 될때 겪게되는 일련의 인식의 차이에서 나타난 부분을 연예인이라는 이름하에 한국에서 돈을 벌고 있는(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돈을 벌고 있다고 인식되어지고 그 돈의 출처가 한국인,한국사회라는 데 배신감이라는 감정에 빠지게 되는것이다.)상황하에 한국을 전부 사랑하고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봐야한다.

한국이 싫다라는 말이 나왔을때 그 말이 그 사람의 어떤 경험에서 나오게 되는지를 살펴봐야한다. 한국이라는 민족주의가 세계적으로도 강한 나라에서 첨 겪게되는 문화적 인식의 차이에서 그들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 봐야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는 흔히 좌든 우든 통일을 이야기한다.
통일에 대한 당위성에 대해서는 우리는 같은 배달민족, 한민족의 후예들이기 때문인다.
즉, 민족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의 가장 빠른 단계는 전쟁에 의한 통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많은 고통과 피해를 강요하게 되는 어느곳 하나 승리자가 없는 싸움일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단계에서 부터 출발하지 않는 통일은 50년 이상 벌어진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통일 이후 분열된 인식을 봉합하는데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게 된다.

즉, 인식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적대감을 유발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물론, 인식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노력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일에서는 2PM의 재범에게서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되기까지 얼굴만 한국인인 외국인에 대한 이해의 노력을 했는가도 함께 되짚어 봐야한다고 생각된다.

좋다! 우리도 잘못했다. 서로의 인식의 차이를 인정하는 노력이라고 했으니
그럼,2PM의 재범의 잘못도 있지 않은가?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듯.
개인적견해로는 재범의 이야기는 상식적 범위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사적인 부분까지 찾아 들어가 2005년도의 생각을 끄집어 내어 여론에 의한 마녀재판을 하고 있는 황색찌라시들의 잘못과 인격적으로 모욕적인 댓글을 달고 있는 우리들이 더 잘못이 크다고 생각된다.
이건 마치, 전문시위꾼을 색출하겠다는 이유로 패킷감청을 하고 4년간의 이메일을 전부 조사해 사적인 부분의 말까지도 끄집어 내고 있는 이 미친정부가 하는 짓과 과연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리고 또 한가지
댓글 중에는 연예인에게 인성교육을 시켜야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연예인이 왜 굳이 도덕적이여야 할까?
공인이라서? 누가 공인이라는 공적지위를 부여한 것 인가?
누가 연예인에게 교육자의 지위를 부여했는가?
연예인이라서 공인이라서 자라나는 10대들에게 악영향을 끼칠수 있으므로
도덕적이여야 한다는 것인가?
자라나는 10대에게 연예인에 대한 판단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연예인이 아닌 어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져야되는 책임 아닌가?
즉, 국영수,대입을 위한 교육만을 강요하고 인문,사회,철학을 가르치지 못하게 만든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 논 책임은 모르척하고 연예인에게 교육자의 길을 걸으라고 말하는 이 이상한 상황을 그저 현실이라는 이름만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최근의 미수다의 베라, 정수근 , 2PM의 재범 등의 사건 아닌 사건을 보면서 철학을 말하지 않으려하는 대한민국 사회가 2MB라는 괴물을 만들어냈을음 새삼 느끼게 된다.

2009년 9월 3일 목요일

한국애니 다시보기 - 아기공룡둘리 임경원감독



2002년 여름

그 당시 서울무비에 근무하고 계셨던
임경원 감독님을 인터뷰했었다.

아기공룡둘리 극장판 - 얼음별 대모험
의 감독 임경원

밀레니엄을 넘겨 홍길동부터 시작한 40년의 한국애니메이션계에서
상업적으로의 성공과 작품의 완성도를 두루 갖춘 작품을 무엇이 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해
그 시절, 우리들은 아기공룡둘리 얼음별대모험을 생각했었다.

찾아봤다.
과연 누가 감독을 했을까?

어렵싸리 인터넷에서 임경원 이라는 세 글자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래서 무작정 돌격했다.

상황과 인식나름 흥행과 작품성을 갖춘 한국애니메이션을 꼽은
작품의 감독은 과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으며
그가 보는 한국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은 무엇일까?

이 인터뷰파일은 편집전 가편집본이다.

이 내용 또한 copyleft 2.0 에 수록이 되었었다.


한국만화 다시보기 - 만화가 박흥용선생님 인터뷰



박흥용 인터뷰/우리시대 건강한 만화란

대담: 박흥용,상황과인식
일시: 2002년8월7일
장소: 박흥용선생님 작업실

비가오는 수요일 만화가 박흥용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선생님의 작업실로 상황과 인식 인터뷰팀이 찾아갔었다.
우리가 찾아갔을때는 선생님께서는 점심식사를 드시고 계셨고 우리는 선생님 집 위층에 마련된 조그마한 작업실로 안내를 받고 올라가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감이 이틀 남은 시점에서 몇시간 의 긴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흥용선생님께 먼저 고맙다는 인사의 말을 남기고 시작한다.

.........

박흥용선생님 프로필
1959년 충북 영동 출생
1981년 돌개바람
1982년 튀어오르는 공, 어린왕자의 노래
1984년 무인도
1986년 백지
1987년 학습만화 세계사
1989년 학습만화 한국사
1992년 나는 골고다로간다, 정류장, 검
1993년 레드 존
1995년 구르름 벗어난 달처럼
1996년 경복궁 학교
1998년 내파란 세이버
2001년 그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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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상황과 인식]이라는 이름하에
과 꼴통들이 몇명 모였었다.

2001년 copyleft 1.0
2002년 copyleft 2.0
이라는 무가지(?)를 출간한적이 있다.

이 인터뷰기사는 copyleft2.0에 실린 기사로
만화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맘에 다시 올려본다.



2009년 9월 2일 수요일

일본의 정권교체

솔직히 남의 나라 일이고
특히 일본의 일이라 별로 관심은 없지만

이번 정권교체는
싸워서 얻은 민주주의가 아닌
전쟁에 패함으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부여받은 민주주의가
54년만에 절차적민주주의를 완성했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오늘 뉴스를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참 많다.
자민당에 대한 불신과 무능,부정부패에 대한
주권자의 심판이라는 이야기가 대다수를 이루었다.
고이즈미에 의한 작은정부 신자유주의노선의 부정적인 부분이
표현화 되어 나타난 양극화문제와
개발논리의 피곤함에 지친 국민의 선택등등...

전문가들이 하는 말들이니
많은 분석들을 했으리나 생각된다.

하지만 과반수를 훌쩍넘는 308석의 민주당을 선택함과 달리
NHK가 실시한 출구조사에 따르면 자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35%로 집계됐다는것이다.
이는 31%의 정당지지율을 기록한 민주당을 앞서는 수치다.
재미있지 않은가?
 
50년 이상 지속되어온 독식체제
버블붕괴이후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경제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피로감등이
마치 2007년 대한민국의 선거를 보는듯했다.
(물론, 2007년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염원했던건 부정확한 찌라시의 남발,선거이슈의선점,죽지않은 경제죽이기등... 수구세력들 매스컴에 의한 조작에 의한 중우정치의 결정판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일본국민
일단 바꾸어보자라는 의식이 혹 강했던건 아닐까?
일본유권자들 어떤 심정으로 투표했나? (JPNews기사 참고)
를 보면 알수 있을 것이다.
왜?민주당이라는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308석을 가지고 갈수있었던 것은
자민당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더 컸기 때문이다.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프레임에 의해 실행된 우정국민영화가 일본 경제에 가져다 준 이익이 극히 미미했고(그 과정에서 간이보험자를 위한 숙박시설에 대한 매각비리가 드러나고) 오히려 그간의 정책으로 인해 도심과 농촌의 양극화는 진행됐다.
그리고 고이즈미 이후 아베, 후쿠다 전 총리 등 2세정치인들은 1년씩 연이어 권력을 내던지면서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고, 집권당 내에 통합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아소의 실언과 결단력의 부족등 무책임한 정당의 모습을 보여준 자민당의 자멸이였다는게 맞을것같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생긴다.
죽은 사회로 불리우는 일본의 활력을 잃어버린 사회가
이번 정권교체로 참여민주주의로의 시발점이 될지
일시적변화의 갈증이 컸던 한 시대의 현상으로만 남아버릴지

변화에 대한 역사적 방향성이다.

민주당의 마니페스토중에 많이 이들이 선호했엇던 것은
어린이수당이다. 중학교 졸업시까지 아이 1명당 매달 2만 6천엔(한화 35만원 상당)씩 일률적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재정마련에 대해서는 MB가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이유와 비슷하게 쓸모없는 곳의 예산을 돌려 충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복지예산의 감소로 이어졌다. 감소한 사회복지를 대신한 것이 22조의 대규모 예산을 쓰는 삽질공사가 될줄은 누가 알았겠나.그리고 참여정부의 모든것을 역행해가며 진행했던 정부기관의 개혁(?)이라는 것이 8/31일부로 참여정부 시절의 청와대와 과연 무엇이 달라졌나 ? 오히려 더 은밀해졌을뿐이다. 강만수는 부활해 좀 더 측근이 되어서 돌아왔다.)

위에 인터뷰기사를 보면 (위부분링크참조) 일본인이 원한 것은 정책철학보다는 자본적 풍요로움이 더 크다.

자민당이 지배하던 54년의 기간후 민주당의 새로운 정권창출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기나긴 독재와 군부정권이후 그들과 야합했던 김영삼정권 그리고 IMF
그를 극보하기 위한 국민들의 선택에 의한 김대중정권의 탄생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우리도 이루었다.

그 시절 98년 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똑똑한 후배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도서관도 다녔다. 우리학교의 경우 도서관앞에서 꽤 많은 집회를 가지곤 했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김대중 정권타도 였다. 정리해고의 칼바람에 곧 사회로 나가야 되는 대학생들이 가장 걱정을 했던 부분은 고용의 창출과 안정적 생활이였지만 IMF의 칼바람과 신자유주의의 확대로 인해 그들의 바람은 뜻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98년도였다. 정권이 바뀐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이였다.
즉,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치라는 것이다. 그 시절 조중동에서 많이 하던 말은 준비되지않는 정권이라는 것, 부정적인 시각의 확대, 그것이 김대중정권을 관통해 노무현정권까지 지난 10년을 관통하는 진보,보수를 옮아맨 가치관이였다.

변화를 원했던 사람에게는 변화의 더딤이 조롱의 대상이였고
변화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존재 그자체가 증오의 대상이였다.

정권교체를 이룬 지금의 일본, 앞으로의 일본도 새 정권에 대한 기대치에 대한 반발도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즉,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원하고 있지만 어떻게 먹고 사는 것이 인간다움인지 대한 고민하지 않는다.

4년째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일본인들은
무엇을?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은 당연히 감수해야 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수의 결정에 순응하는 개인의 목소리를 배제 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특유의 迷惑かけるな(남에게 피해 끼치지마)라는 정신과 함께
-이부분에 대해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것이 좋은것 아니냐는 말도 나올 수 있지만 여기서는 피해를 끼치지않기 위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줄이고 점점 더 개인화되어가는 인식의 작용을 말하기로 한다.
建て前(입발린 말)로 대표되는 일본인들의 특유의 성향까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번의 정권교체는 하나의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009년 9월 1일 화요일

진중권 씨에 대한 압력과 탄압을 중단하라!

미학자이자 사회비평가로서 대한민국의 지식계에 소중한 역할을 해왔던 진중권 씨가 현재 곤경에 처해있다. 그가 미학 연구자로서 관계해왔던 공립, 사립 대학교에서 연달아 그의 자리가 사라졌다. 또 그는 지금 여섯 개에 달하는 재판과 소송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밖에도 소득세 납부 등의 이유로 집요한 감사를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를 진중권 씨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여 보지 않는다. 또 특정한 이념적 노선의 지식인들에 대한 사회적 탄압의 차원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사태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독립적 지식인 그리고 공공적 지식인이 설 자리가 존재하는가라고 하는 더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 사태는 독립적 지식인의 위기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상상력과 비판과 제안에 관한 한 무제한의 자유가 허락되었을 때에 비로소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무제한의 자유를 실현함에 있어서 권력이나 자본 나아가 대학이나 학제와 같은 일체의 제도적 배경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지적 작업을 수행해나가는 독립적 지식인의 존재는 그래서 민주사회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존재이다.

또 이 사태는 공공적 지식인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늘날의 제도화된 지식계는 갈수록 전문적인 세분화를 겪고 있으며 그 생산물은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 도 이해하기 힘들게 암호화되어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분절화된 전문 분야를 넘어서서 사회 전체가 당면한 문제들과 대면하여 이를 공공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공적 지식인의 존재가 또한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이다. 이들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탈을 쓴 엘리트 지배나 중우 정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진 중권 씨는 지난 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척박한 한국의 지적 토양에서 이 두 가지 역할을 몸소 구현한 이이다. 그는 권력이나 자본은 물론 좁은 의미에서의 대학이나 학제와 같은 제도에 의존하거나 구애받지 않은 채 자신의 독특한 논지와 주장을 벼려온 이로서 널리 인정받아 왔다. 또 특정 분야의 전문성에 갇히지 않고 제도적 지식인들이 기피하는 예민하고 어지러운 논쟁 구도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사회 전체의 소통과 공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위치는 그가 내놓은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과 그 각각이 거두어온 놀라운 대중적 성공이 여실히 증명한다.

지난 몇 개월간 이 사회의 각종 권력 제도는 자신들이 이러한 독립적 지식인 그리고 공공적 지식인을 얼마나 기피하고 위험시하는지를 스스로 폭로하였다. 한마디로 비열하고 치사하다고 밖에 달리 말을 찾지 못하겠다.

비열하다. 어느 하나의 기관이나 제도도 아니다. 어느 하나의 사유와 명분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 기관에서 공립 대학, 사립대학에 이르는 지식계의 다양한 "기존 권력"이 다양한 이유를 들면서 공모라도 한 듯 똑같은 행동의 보조를 맞추고 있다.

치사하다. 그의 자리를 빼앗으며 내건 이유들, 명분들이라는 것이 참으로 안쓰러운 것들이다. 진중권 씨가 학위가 없다거나 다른 기관에 직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도대체 지난 몇 개월간 새로 발생한 사유인가? 어째서 지난 몇 년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 이 몇 개월 사이에 한꺼번에 문제가 된단 말인가?

이 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제도나 권력에 기댈 곳을 마련하지 못한 지식인이란 실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취약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진중권 씨와 같이 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얻고 있는 지식인도 이럴진대 그조차 갖지 못한 이들은 이 사회에서 과연 권력, 자본, 대학에 어서 빨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일렬종대로 늘어서는 것 이외에 다른 지적 작업을 할 용기를 감히 낼 수 있을까?

또 민주사회의 주인인 공공 대중의 의식을 풍부하게 하고 소통시키기 위한 작업에 과연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진중권 씨를 지켜내는 일이 진중권 씨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작업하고 사유하는 지식인들 일반을 보호하기 위한 공공성을 가진 일이라고 믿기에 이렇게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우리는 야유한다. 힘없고 가진 것 없어도 그저 지적 자유를 만끽하고 이웃과 공유하는 것 하나를 인생의 기쁨이자 소명으로 여기는 지식인들에게 이 사회의 기성 권력이 돌려준 대접에 대해서. 또 우리는 충고한다. 국민의 태반이 대학을 졸업하고 독자적 사유와 토론 능력을 가진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지식 사회의 대세를 행여 몇 가지의 알량한 제도적 권력을 휘둘러서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다는 낡은 생각을 포기할 것을.

진중권 씨에 대한 유형무형의 압력과 탄압을 중지하라. 우리 인문사회과학 저자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 단단하게 기둥을 박은 공공장의 담론의 힘을 믿으며, 우리의 독자들 그리고 공공 대중과 함께 연대하여 진중권 씨를 지키고 지식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강 준만(전북대 교수), 고종석(<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우석훈(<88만 원 세대> 저자·연세대 강사), 홍기빈(<거대한 전환> 역자·국제정치경제칼럼니스트) 이상 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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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에서 퍼왔습니다.

영화배우 장진영 끝내 사망

안타깝네요.

좋아하는 영화배우이고
이제 점점 좋은 연기력을 펼쳐가던 중이였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